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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Warning:
Category:
Fandom:
Relationship:
Characters:
Language:
한국어
Stats:
Published:
2022-09-19
Words:
435
Chapters:
1/1
Kudos:
6
Bookmarks:
1
Hits:
81

드로잉

Summary:

2016년에 쓴 피터커트 단문.
엑스맨 아포칼립스 엔딩 이후 시점으로 쓰였습니다.

Work Text:

커트의 손에 쥐어진 연필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피터에겐 더 없는 고역이었다. 안 그래도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야 하는 것이다.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었다. 피터는 보란 듯 불퉁스럽게 앉아 있었지만 화가는 모델의 표정 따위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날 보고 있긴 한 거야? 종이만 보고 있을 거면 뭣 하러 모델을 세워놓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다. 선을 몇 번 긋기에 좀 진도가 나가나 기대하면 어느새 파란 손가락 세 개엔 연필 대신 지우개가 쥐어져 있었다. 피터는 제가 뺨을 긁적여도 커트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다.

"움직이지 말아요."

"모기 물려서 가렵다고. 그보다 내가 움직인 건 어떻게 알았어?"

"뺨 근처 머리카락 모양이 바뀌었어요."

피터는 제법 놀랐다. 그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체 언제?

"관찰력이 좋네? 그런데 왜 진도는 나가질 못 하니."

"피터 입이 자꾸 움직여서요."

이 자식이! 피터는 한 마디 던지려고 했으나 커트의 시선이 도로 종이에 꽂힌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다음엔 눈알 굴린다고 잔소리할 것 같았다. 머리카락 한 올 움직이지 말라니, 할 수 있는 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 외엔 없었다. 낮에 학교 식당에서 먹었던 식사, 수업 시간에 졸고 있었는데 행크가 깨웠던 일을 떠올리던 피터는 지금 제가 맞닥뜨린 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왜 쟤가 그림 그린다는데 내가 모델을 해주고 있지?

커트 바그너가 얼마 전에 갖게 된 취미가 그림 그리기란 것이 문제였다. 대머리 교수도, 시퍼런 털쟁이 조교와 빨간 머리 모범생도 피터의 룸메이트가 갖게 된 취미를 아주 바람직하게 여겼다. 얌전한 성격의 커트에게 잘 어울리는 취미라고 생각한 것이다.

피터는 그들이 다 제삼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모델이 되어보라고 해, 아주 죽을 것 같지. 침대 두 개가 벽 양쪽에 나란히 붙어있는 방 안에서 모델은 자기 침대에 앉아, 화가도 자기 침대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삼십분째 이러고 있는 걸 그들이 안다면. 대머리 교수와 빨간 머리 모범생은 이미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간 하품이 나올 뻔 한 것을 참으며, 피터는 눈물 고인 눈으로 힐끗 화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커트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말간 호박색 눈동자가 아마도 피터의 눈과 코, 입, 머리카락, 그리고 어깨에 눈길을 주었다. 피터는 커트가 정확히 자신의 어디를 관찰하는지 보지 못 했다. 다만 커트의 눈은 보았다. 꽤 천천히, 꽤 오랫동안.

아주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조금 덜 느려지자, 커트는 다시 종이를 보고 있었다. 피터와 눈이 마주친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피터의 짧고도 긴 관찰은 커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모름지기 제대로 된 관찰이란 관찰 대상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쟤가 나를 저런 눈으로 보고 있었네. 저 눈으로 나에게 부탁했었지. 모델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라면서. 피터 막시모프의 관찰기는 그 자신의 입으로 나불대지 않는 한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방금 눈을 마주쳤을 때 꼭……. 엄마에게 침대 밑에 숨겨둔 잡지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피터, 움직이는 거 다 보여요."

"알아, 나도 알아."

안다고요? 뭘요? 커트가 의아한 눈으로 모델을 바라보았을 때, 피터는 제 침대 곁 테이블 위의 물주전자를 몽땅 비운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