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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 未亡

Summary:

어린 놀로핀웨는 아버지의 부정을 목격한다.
Young Ñolofinwë saw his father's infidelity.
Finwë x Fëanor
Fingolfin x Fëanor

Notes:

Finwe x Feanor 를 전제로 한 Fingolfin x Feanor.

나는 'Accidental Voyeurism' 태그를 사용했습니다.

Work Text:

 

 

 

핀웨 저택의 네 남매 중 부친의 일족을 가장 많이 닮은 아이는 인디스의 둘째인 놀로핀웨 아라카노였다.

저택에서 태어난 첫 딸인 장녀 핀디스는 굽이치는 금발처럼 어머니의 점잖은 일족을 닮았다. 생기있지만 엄숙한 얼굴을 한 그녀는 거의 언제나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인디스의 셋째인 차녀 이리메는 놀도르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탔던데다 언니나 어머니와 항상 행동을 같이 해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별반 없었다. 막내아들인 아라핀웨 인골도는 아직 많이 어렸으나 그 역시 바냐르의 신사적인 기질을 금발과 함께 물려받았음이 차츰 밝혀지고 있었다. 어린 아라핀웨는 악기를 만지작거리거나 알쿠아론데에서 보내온 조개껍데기들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이 점에 그의 형인 놀로핀웨 아라카노는 크게 실망했는데, 호전적이고 활동적인 기질을 타고난 그는 남동생이 생기면 함게 사냥 놀이를 하거나 들판을 뛰어다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기 때문이었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입장상 말썽을 부리거나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는 부친이 지어 준 이름처럼 용감했고 네 자녀 중 모험과 야외활동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깜깜한 가운뎃땅으로부터의 ‘대여정’ 이야기를 가장 신이 나서 들었고 맑은 날에는 밖으로 달려나가 숲이나 들판에서 뛰놀았다. 초보적인 사냥 - 사냥 놀이라고 부르는 쪽이 적절할 -을 하기도 했다.

밖엔 나갈 수 없는 날 집 안에서 할 수 있을 만한 활동을 가장 먼저 찾아낸 것도 그였다. 티리온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핀웨의 하얀 집은 꽃과 나무, 조그마한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놀도르의 건물답지 않게 층은 높지 않았지만 가로로 길고 넓었으며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원을 사는 그 거주자들의 특성상 시간의 흐름이 건물에 남지 않을 수 없어 겉으로는 흠없어 보이는 이 저택의 내부는 사실 보기보다 복잡했다. 필요에 의해 덧붙였다가 용도가 다해 잊혀진 통로들, 증축된 방들, 허물어진 벽과 누가 파두었는지 모를 생울타리 구멍, 과거의 모습 그대로 방치된 빈 방들 따위가 집안 곳곳에 뒤섞여 있었다. 핀웨의 재혼으로 고용인들이 한 번 바뀌고, 제각각의 성질을 가진 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변화는 더욱 급격해졌다. 그 때문에, 거대한 저택은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어린 소년의 눈에 탐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신비의 보고 정도로 보이게 되었다. 어린 소년 놀로핀웨는 집안에 아직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들이 많다는 데 흥미를 느꼈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날이면 복도와 빈 방들을 쏘다니며 오래된 옷장을 열어보거나, 이제는 잊혀진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고는 했다.

그러던 중 저택의 동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우연이었다. 만일 아버지의 서재 근처에서 길을 잘못 들지 않았더라면 그 쪽으로는 발길을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탐험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 대부분에게 이 저택의 동쪽 구역은 거의 없는 곳과 다름없이 여겨지고 있었다. 이는 안주인인 인디스의 영향이었다. 저택 서편에서만 생활하는 그녀 탓에, 그녀의 아이들과 고용인들의 생활 범위 역시 서편으로 고정되었던 것이었다. 저택은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이는 별달리 문제되지 않았고, 아이들은 그런 제약을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컸다. 저택 동편 복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놀로핀웨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했으나, 이내 창 밖으로 그가 매일같이 보고 자란 뜰과 정문, 숲의 위치를 확인하고 상황을 알아차렸다.

같은 집이라고 해도 그가 자란 곳과 동쪽 복도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판이했다. 물론 핀웨의 저택답게 꾸준히 관리되어 더러운 먼지가 쌓여 있다거나 퀘퀘한 냄새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이 생활하지 않은 장소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공간 전체에 맴돌고 있었다. 보통 아이라면 그 차디찬 기운에 위화감을 느끼고 지레 겁먹어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나, '용감한' 놀로핀웨 아라카노는 오히려 모험심을 느꼈다. 무언가 낮설고 위험하며 비밀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은 그 나이대 소년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자극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로핀웨는 숲과 들판에 나가노는 대신, 가족들 몰래 저택 동편에 숨어들어 빈 방과 복도를 탐험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소년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마치 미지의 땅을 탐사하는 모험가처럼 관찰했다. 그가 자란 저택 서편의 모퉁이와 복도에는 어디에나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화사한 풍경화와 꽃 장식이 걸려 있었다. 반면 동편의 벽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묵직한 태피스트리들이었다. 잎사귀나 꽃잎 문양을 수놓은 아주 조그마한 것부터 부친 핀웨의 문장을 담은 크고 위엄있는 것까지 온갖 크기와 색의 면직물이 가득했다.

방문들은 대체로 잠겨 있었지만, 환기나 청소 문제가 있어서인지 언제나 한두 곳은 열린 채였다. 아라카노는 고용인들이 일하는 시간과 패턴을 금새 파악했고 매번 새로 열린 빈방에 몰래 숨어들어갔다.

탐사 결과 대부분의 빈방은 평범한 손님방으로 밝혀졌으나, 특이한 곳도 몇 있었다. 네 번째로 열렸던 방이 그랬다. 조그마한 서재 같았는데,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느냐 하면 빈 책장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꽂혀 있던 책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모양인지, 책장들은 잎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처럼 속이 비어 있었다. 놀로핀웨는 어쩐지 압도된 듯한 기분으로 빈 서가 사이를 거닐었다. 그러다 어느 책장 구석에서 책과 종이 몇 권을 발견했다. 옮기거나 버리려다 잊혀진 것인 모양이었다. 붉은 장정이 된 작은 책들은 아르다 동식물을 다루는 박물지 같았고, 종이들에는 무언가를 그린 스케치, 의미모를 십자표와 몇 개의 동그라미들, 직선과 곡선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종이들에 갈겨쓰인 문자들은 지금 것과 달랐다. 세로로 쓰여져 있었고 영 어색했으며 정확히 읽히지 않았다.

 

 

"루밀님의 문자로군요. 사라티라고 불렸지요"

 

놀로핀웨가 내민 종이를 받아본 글쓰기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밀을 원하는 소년은 자신의 전리품을 쉽게 내보이고 싶지 않아 하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간절한 호기심이 이겼다. 왕가의 남매들에게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은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양 과거의 사라티 문자와 지금의 텡과르 문자 간 읽고 쓰는 법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소년이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종이에 쓰인 문자들의 의미를 알려달라고 조르자 선생은 그것들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무엇을 발견한 듯 작게 웃었다.

"설계도인데, 대장간 일에 쓰이는 기물들을 그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놀로핀웨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종이 구석을 가리켰다. "페아나로 님의 작품 같군요. 집안에서 찾으셨나요? 저는 대장간 일에 조예가 없어 정확한 설명을 드릴 수는 없지만 당신의 이복 형 되시는 그분이 이 기계를 직접 만드셨지요. 아, 우리 문자를 사라티에서 지금의 텡과르 형식으로 개선한 것도 그분이시랍니다."

놀로핀웨는 선생에게서 그 오래된 종이들을 받아들었다. 종이 구석의 서명이 어렴풋이 읽혔다. 놀로핀웨 위로 아버지의 아들이 한 명 더 있고, 이 집에 어머니 이전의 안주인이 계셨다는 사실은 아주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저택에서는 아무도 그 일을 큰 소리로 떠들거나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놀로핀웨에게 그들은 어릴 적 배갯머리에서 들은 동화 속 인물들처럼 막연하고 희미하게만 느껴졌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그 복도와 방들을 헤매고 다니면서도 그들에 대해 떠올리지 못했었다...

평소 학업에 큰 뜻이 없던 놀로핀웨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자 선생은 신이 나서 이복형의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는 업적들을 자신의 일처럼 풀어놓기 시작했다. 형은 루밀의 사라티 문자를 지금의 텡과르 방식으로 더 낫게 개선했다. 형은 저명한 언어학자로, 그들 언어의 문법과 발음구조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는데 그것들은 학계에서 몇십 년간 지속되어 오던 논란들에 종지부를 찍을 만큼 훌륭한 것들이었다. 그가 이 업적들의 대단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자 선생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형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을 만든 최초의 장인이라고 했다. 그의 손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보석은 밤하늘의 헬루인처럼 푸르고 또 희게 빛났다. 그건 여태껏 땅에서 힘들여 캐냈던 보석들보다 훨씬 아름다웠더라고 했다. 형이 특수하게 가공한 투명한 원석을 눈에 가져다대면 아주 멀리에 있어 희미하게만 보이던 사물들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이 보였고, 또 형이 만든 등불은 번거롭게 불을 붙이고 끌 필요도 없이 스스로 주변을 환히 밝힌다고 했다. 광장의 아름다운 기념탑을 설계한 것도, 아버지 핀웨의 아름다운 왕관과 은 지팡이를 만든 것도 다 그 형이었다. 어느새 식어버린 찻잔을 들며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젊은 나이로, 학문이나 기술에 뜻을 둔 자 중 그분을 우러러보지 않는 이는 없답니다. 그분은 부친이신 핀웨 님의 큰 자랑이시지요.

“그럼 그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놀로핀웨의 말에 선생은 놀란 듯한 기색을 하더니 이내 조금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놀로핀웨 님은 형님을 뵌 적이 없으시겠군요. 그분은 오랜 여행을 하고 계시답니다. 발라들의 영지를 주유하고 계시다고 하니, 분명 위대한 발견들과 함께 돌아오시겠지요. 사실 저도 그 분을 직접 뵌 일은 없답니다. 그저 저술과 유명한 작품들로 접했을 따름이예요.”

저물어가는 라우렐린의 빛이 창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젊은 선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가득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는 핀웨 집안의 유명한 불화를 몰랐거나, 알았더래도 위대한 업적을 논하는 데 있어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결과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그것은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 때부터 어린 아라카노 놀로핀웨의 마음에는 손윗형제에 대한 선망이 봉오리를 부풀리는 꽃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형에게 괜히 친밀감이 들었고 그의 업적이 마치 제가 이룬 일인 양 자랑스러웠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놀로핀웨는 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쩌면 형과 함께 숲이나 물가에서 검을 가지고 놀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사냥을 나갈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런 부탁을 하기에 아버지는 어려운 분이었고, 외가의 친척들은 너무 어리다며 그를 끼워 주지 않았다. 어쨌든 형은, 누나나 여동생, 그리고 아주 어리고 보호가 필요한 남동생과는 다른 존재였다. 굳이 말하자면 이복형이었지만 그 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시들했던 저택 동편 탐험도 다시 재미있어졌다. 그 일은 발라들께서 다스리시는 미지의 땅을 헤매고 다닌다는 형의 모험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용인들이 쉬는 방에서 그는 열쇠 꾸러미를 몰래 '빌렸고' - 나이가 좀더 들었다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겠지만 이 때 그는 정말 쓰고 가져다 놓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 이제껏 열지 못했던 문들 안에도 하나하나 들어가보았다.

어느 방에서는 체리색의, 아주 낡은 어린이용 책상을 보았다. 파인 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게 쓰였지만 군데군데 잉크 엎지른 자국이 눈에 띄었다. 다른 방에서는 아주 옛날에 쓰였던 듯한 작은 요람과 모빌을 발견하기도 했다. 조그마한 모루와 망치 장난감, 책과 스케치 더미도 방 한켠에 함께 쌓여 있었다. 그 물건들은 이곳에 드리운 형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놀로핀웨는 퀘퀘묵은 옷장들, 빈 화병, 오래된 캔버스들을 지나쳤다. 어느 날에는, 먼지가 쌓인 커다란 베틀 옆에 다양한 종류의 바늘들이 꽂힌 바구니가 놓인 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도합 열 네 개의 열쇠구멍을 정복하며 어린 놀로핀웨는 미지의 저택 탐사를 마쳐 갔다. 그러나 여기서 탐사를 끝내기에는,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방이 하나 있었다. 중앙 복도 끝 방이었는데 꽃과 나무덩굴이 음각된 두 짝짜리 나무 문이 달려 있었고, 저택 서편과 대조하자면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가장 크고 훌륭한 문이 달렸으니 소년이 생각하기에 이 곳이 그의 탐험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인데, 어째서인지 이 문에 맞는 열쇠만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가는 걸까? 어린 소년은 그 방의 비밀이 궁금해 한참을 앓았다. 그곳의 문을 열지 못하면 그의 모험은 영영 마지막 페이지가 미완인 채로 남게 될 것 같았다. 그는 저택 동편의 벽들, 복도들, 화병과 그릇 밑바닥을 면밀히 조사했고, 숨겨진 통로는 없는지, 비밀의 암호를 외워야 하는지도 살펴보았지만 영 수확이 없었다

 

얻는 것 없는 수색에 슬슬 지쳐 가던 와중 정원 생울타리 구석에서 좁은 틈을 발견한 것은 전적인 우연이었다. 생울타리를 경계로 정원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생울타리 구석의 좁은 틈으로 몸을 밀고 들어가니 그곳엔 조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그 비밀의 정원엔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 있었고, 숲 옆에 대어진 아담한 울타리 옆으로 은빛 꽃나무와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낡은 나무그네가 있었다. 작은 관목 너머로는 하얀 발코니가 보였는데, 그가 이제껏 못 견디게 궁금해했던 그 동쪽 끝 방의 일부임에 틀림없었다. 발코니의 하얀 나무 울타리는 소년이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방 안으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지만 문고리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어린 아라카노는 너무 기뻐 그만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를 뻔 했다. 기막힌 우연 덕에 그는 드디어 모험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 날 놀로핀웨는 그대로 문을 열어 안을 보지도 하다못해 창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저택 서편으로 돌아갔다. 라우렐린이 저물어 누나에게 약속한 귀가 시간이 가까웠다. 활달해 보이는 외형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핀웨의 차남은 깊은 인내의 천성을 타고났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으며 모든 즐거움을 한 번에 누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놀로핀웨가 모험의 마지막 장으로 귀환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날 놀로핀웨는 집에 들어가기 전 마치 그곳에서 종일 놀았던 것처럼 꾸미려 숲을 쏘다니다가 그만 개울가에서 발을 헛디뎠다. 온몸이 푹 젖어선 왼쪽 무릎이 깨진 채 집에 돌아온 그가 '무릎이 다 낫고 조심성을 기를 때까지' 숲으로의 외출을 금지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덕택에 놀로핀웨는 한동안 뜨개질을 하는 누나 곁에 엎드려 책을 읽는 숙제를 하거나 여동생의 실뜨기나 조약돌 놀이에 동참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린 남동생이 조개껍데기를 색깔별로 분류하며 부르는 노래는 덤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목적지는 저 숲이 아닌 이 저택의 반대편이었지만, 왠지 그 점에 대해서는 말해선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긴 시간을 인내한 결과 기회는 찾아왔다. 그날은 공기가 습습했다. 아버지는 외출로 자리를 비우셨고, 어머니와 누나, 고용인들은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손님맞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어린 아라카노는 그를 감시하는 가족들의 눈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림자 속에 숨어 움직이는데 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비밀스러운 계획 때문에 속이 달아 조바심이 나는 것일까,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택 동쪽 복도에 들어서고 나서도 이상스런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요 몇 달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복도가 어딘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장 작은 태피스트리의 위치, 협탁 위 화병의 각도 하나 바뀌지 않은 게 분명한데 왠지모를 위화감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과거에 멈추어 있던 물건들이 갑자기 생기를 얻은 것 같았다. 놀로핀웨는 허락받지 않은 곳을 탐험한다는 짜릿한 스릴 대신, 저를 거부하는, 금지된 곳에 발을 들인 듯한 거북함을 느꼈다. 하지만, 기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인 그가 이 집에서 가지 못할 곳이 어디란 말인가? 아무도 그에게 명시적으로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고 명령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와락 부른대도 당당할 자신이 있었다.

 

불안한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며 놀로핀웨는 조그만 부엌에 연결된 뒷문을 살그머니 열고 나가 정원을 가로질러, 전에 봐 두었던 비좁은 생울타리 틈바구니로 들어갔다. 자, 이제 모험의 마지막 장이었다. 흰 발코니를 넘어가 그 하얀 문을 열고,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나오면 끝이었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위화감은 이제 거의 오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곳의 풍경에 그의 기억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

동쪽 끝 방으로 통하는 하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놀로핀웨의 발걸음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그 외에도 누군가, 이 문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는 것일까. 그저 청소중인 고용인이나, 집안 가솔일지도 모르는데 왜인지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그는 발코니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창문 밑으로 다가갔다. 열린 문 안쪽에서는 무언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매끄러운 천이 쓸리는 듯한... 그리고,사람의 목소리?

놀로핀웨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중앙에 놓인 침대 위로 거의 한 몸처럼 얽혀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놀로핀웨는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으나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멍한데, 문틈으로 스며나오는 소리들은 놀라울 만큼 잘 들렸다. 낮게 신음하는 두 목소리, 그 중 하나는 분명...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오고,"

놀로핀웨가 잘 아는 목소리였다.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인데, 아버지 같지 않았다. 깊었고, 숨이 차 헐떡이는 것 같았고, 이상했다.

"하지만 나와 주셨잖... 습니까,"

아버지는 낮선 남자를 안고 있었다. 붉은 옷자락을 휘감은 그 남자의 하얀 다리가 아버지의 허리에 걸쳐져 있었다. 아버지의 몸이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남자도 흔들렸고, 둘은 함께 낮은 숨을 내쉬었다. 놀로핀웨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창틀을 쥔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가 목격하는 건 분명 아버지의 부정不正이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버지에게 안긴 남자는 얼굴선이 단정했고 쇄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발그스레하게 들뜬 피부에 들러붙어 있었다. 상기된 뺨, 벌어진 입술,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릴 때마다 회색 눈이 만족스러운 듯 감겼다. 그의 하얀 팔이 덩굴처럼 뻗어나가 아버지의 목을 감았다.

낮게 신음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긁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너무 잘 들렸다.

"... 나도 그랬단다, 페아나로."

소년의 부친은 제 품 안의 남자의 이마에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을 떨어뜨렸다. 아라카노는 저도 모르게 창틀로부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발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아버지와 이복형은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너무나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지러웠다.

이성이 마비된 듯 머릿속이 새하얀 와중에도 들켜서만은 안 된다는 본능은 있었던 것 같다. 그 날 제가 어떻게 정원을 빠져나와, 숲을 빙 돌아 저택 서편으로 돌아왔고 어머니와 누나의 잔소리를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넘겼는지는 한참을 지나 생각해봐도 모를 일이었다.

외출하셨던 아버지는 저녁 늦은 시간에야 돌아왔고, 다음 날 아버지의 장자이자 그의 이복형이라는 페아나로 쿠루핀웨는 공식적으로 긴 여정을 마치고 티리온에 귀환했다. 자신의 집에 짐을 풀기도 전에 아들들을 데리고 부친의 저택부터 방문한 그를 맞으러 핀웨는 실내복 바람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은 저택 정문 앞에서 격한 포옹을 나누었다.

그들 네 남매가 이복형, 그리고 만도스의 전당으로 떠난 그의 어머니에 얽힌 집안의 가족사를 처음으로 그리고 제대로 듣게 된 것도 이 때쯤 해서였다. 다른 남매들이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동안 인디스의 첫 아들이자 핀웨의 차남은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

 

내 형제는 아버지의 관 바로 곁에 거의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축복받은 땅에서 맞은 첫 죽음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발라들은 매장이라는 장례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누일 아름다운 관이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조그마한 흰 꽃을 뿌렸다. 안장되기 전 부친의 관은 티리온의 궁성에 놓였고 많은 이들이 슬픔의 예를 표하러 찾아왔다. 많은 이들이 내 이복형제의 오열을 보았다.

그는 며칠 째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친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절했고 깨어나자마자 어둠 속으로 달려갔으며 팔을 잡혀 끌려온 뒤로는 이 꼴이었다. 두 나무의 빛이 사라져 사위가 어두웠고 오직 등불의 빛만이 넓은 홀을 드문드문 밝혔다. 그의 그늘진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말라붙었고, 머리카락은 다 흐트러졌으며, 늘 입던 붉은 예복은 이제 그에게 너무 크게 느껴졌다.

평소 그와 척을 졌던 자들도 연민과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축복받은 땅에서 자식으로 태어난 이 중 어머니 없이 자란 아이는 그뿐이었는데 그에겐 이제 어느 쪽 부모도 없다고. 왕을 잃은 슬픔 이상으로, 아버지 잃은 아들 페아나로에 대한 연민이 궁성을 가득 채웠다. 오직 나만이, 그가 진실로 누구를 잃었는지 알았다. 내 어머니는 남편의 관 곁에 오래 서 있지도 못하셨다.

"형님."

언제나와 같이 그는 내 목소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제 몸을 좀 추스르십시오. 며칠 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가 듣고 있다는 걸 안다. 위로하듯 어깨에 손을 얹자 그가 몸서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한 번, 저는 당신을 따르겠노라 맹세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함께 우리 도시를 다스리십시다. 부친의 유지를 이읍시다."

가능한 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어조로 나는 말했다.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만. 충분히 들었다."

그는 내 쪽은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러나라는 의미의 손짓을 하고는 깊이 잠든 듯 평화로운 우리 아버지의 얼굴만을 한없이 들여다보았다. 그 일렁이던 회색 눈. 나는 내 안의 여러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안다. 그러니 확신을 담아 말하자면 아버지의 관을 앞에 둔 그 때 내가 했던 말들은 진심이었다.

나 또한 그 분의 죽음이 비통했고 축복받은 땅이 입은 손실과 '검은 적'모르고스의 범죄에 분노를 느꼈다. 우리가 단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건 이성이 내린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얼마나 냉철했던가? 사실을 말하자면 당시 심장의 밑바닥에서 일렁이던 은밀한 기쁨에 대해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린 아들이 느낄 감정이 아니라는 건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년의 어느 날 이후로 자라난 내 안의 어두운 부분이 있었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부친을 방해자로, 그리고 손위의 이복형제를 욕망의 대상으로 느끼게 하곤 했다. 내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아 준 일 없는 그를.

수치스러웠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욕망이 내 안의 다른 부분들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 죽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듯 아버지의 육신 곁을 떠나지 못하는 형제에게 등을 돌리고 궁성을 걸어나오며 나는 조용한 희망에 차 있었다.

아, 나는 내 앞에 기회가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후 내 형이 벌인, 저 만도스를 제외한 누구도 예상치 못했고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꾼 그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그 때 형의 비탄을 그런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봤자 달라질 것은 많지 않았겠지만, 어차피, 이제 전부 끝나 버린 일임에도.